
[성명서]
위력성폭력 사건의 위계와 맥락을 외면한 반(反)성인지적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2심 재판부는 사건의 구조적 맥락을 외면
지난 11월 11일, 배우 오영수 씨의 강제추행 혐의 항소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대로 강제추행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에게 이익을 주는 원칙’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성폭력 사건의 본질인 ‘위계와 젠더 권력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한 판단이다.
가해자는 연극계의 원로였고, 피해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이었다. 이 관계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이 아닌, 권력과 의존이 교차하는 위계적 관계였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상황에서 왜 즉각적인 거부나 신고를 하지 못했는지, 그 ‘침묵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현실적 구조를 외면한 채, 추상적 법 논리만을 적용한 결과다.
피해자의 ‘합리적 두려움’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
가해자가 “안아보자”고 말했을 때 피해자는 이를 연극계 선후배 간 친밀한 인사로 이해했다. 그러나 실제 포옹 순간 피해자는 명백한 성적 불쾌감과 굴욕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막 입문한 업계에서의 평판과 단절을 우려해 즉각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이는 법이 인정하는 ‘합리적 피해자의 관점’, 즉 피해자와 같은 처지의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던 상황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러한 구조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명시적 거부가 없었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경험을 배척했다. 이번 판결은 한국 사법부가 여전히 성폭력 사건 심리에서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의 원칙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을 근거 없이 불신한 재판부
피해자는 사건 발생 6개월 후 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상담을 받았으며, 지인들에게 사건을 알리고 고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진술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했다.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목격자 없이, 물리적 흔적 없이 발생한다. 따라서 법원은 피해자의 진술과 정황, 사후 행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근거 없는 ‘기억 왜곡 가능성’ 운운은 결국 피해자의 말을 다시 침묵시키는 판결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이번 판결은 일반적인 판례 경향과도 상충된다. 통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경우, 법원은 이를 범행을 시인하거나 최소한 사실관계를 인정한 정황으로 본다. 그러나 재판부는 오씨가 피해자에게 보낸 명백한 사과 메시지를 오히려 ‘문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한 방어적 행동’으로 해석하며 무죄의 근거로 삼았다. 피해자는 지난 2021년 10월, 오씨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기억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오씨는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심정이 지나친 행동으로까지 간 것 같다, 고맙고 애틋한 마음에 네가 딸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이성으로 느끼기도 했다”는 답을 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당시 오씨가 출연한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과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피고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통상적인 사법 판단 기준에서 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이고, 성폭력 사건의 권력·위계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 주거지 복도의 구조, 센서등의 작동 여부,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피고인에게 감사·안부 메시지를 보낸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에 의심을 제기했다. 심지어 ‘피해자가 너무 늦게 상담소를 방문했다’는 비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이는 현실의 피해자 행동양식을 무시한, 반(反)성인지적 판단이다.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 이익’ 원칙의 기계적 적용을 경계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원칙은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형사법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적용은 결국 그 원칙이 권력자의 방패로 기능하고 피해자에게는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피해자의 진술이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되기 어려운 사건 구조 자체를 간과한 이번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다시 상처받는 현실을 반복하게 만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대법원은 이미 판례로 확립한 ‘성인지 감수성’ 원칙에 따라, 해당 사건에 대해 최종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 둘째,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회적·위계적 관계를 범죄 성립 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명확히 반영하라. 셋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평가 시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이 아닌 정황적·구조적 분석을 기준으로 삼아라. 넷째, 성폭력 사건에서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 이익’ 원칙의 기계적 적용을 지양하고, 피해자 보호 중심의 증명 접근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라.
이번 판결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유무죄를 넘어, 한국 사법체계가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위계와 권력, 젠더와 구조를 보지 못한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번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성폭력 사건의 구조적 특성을 반영한 성인지적 사법개혁과 판결 원칙의 제도화를 강력히 촉구한다.
2025년 11월 13일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성명서]
위력성폭력 사건의 위계와 맥락을 외면한 반(反)성인지적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2심 재판부는 사건의 구조적 맥락을 외면
지난 11월 11일, 배우 오영수 씨의 강제추행 혐의 항소심에서 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대로 강제추행이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에게 이익을 주는 원칙’을 적용했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성폭력 사건의 본질인 ‘위계와 젠더 권력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한 판단이다.
가해자는 연극계의 원로였고, 피해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초년생이었다. 이 관계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이 아닌, 권력과 의존이 교차하는 위계적 관계였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피해자가 당시 상황에서 왜 즉각적인 거부나 신고를 하지 못했는지, 그 ‘침묵의 배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는 현실적 구조를 외면한 채, 추상적 법 논리만을 적용한 결과다.
피해자의 ‘합리적 두려움’을 고려하지 않은 판결
가해자가 “안아보자”고 말했을 때 피해자는 이를 연극계 선후배 간 친밀한 인사로 이해했다. 그러나 실제 포옹 순간 피해자는 명백한 성적 불쾌감과 굴욕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막 입문한 업계에서의 평판과 단절을 우려해 즉각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못했다. 이는 법이 인정하는 ‘합리적 피해자의 관점’, 즉 피해자와 같은 처지의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성적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던 상황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러한 구조적 맥락을 반영하지 않고, 단순히 “명시적 거부가 없었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경험을 배척했다. 이번 판결은 한국 사법부가 여전히 성폭력 사건 심리에서 요구되는 ‘성인지 감수성’의 원칙을 체득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을 근거 없이 불신한 재판부
피해자는 사건 발생 6개월 후 성폭력상담소를 찾아 상담을 받았으며, 지인들에게 사건을 알리고 고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진술을 유지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시간이 흐르며 기억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했다. 성폭력 사건은 대부분 목격자 없이, 물리적 흔적 없이 발생한다. 따라서 법원은 피해자의 진술과 정황, 사후 행동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근거 없는 ‘기억 왜곡 가능성’ 운운은 결국 피해자의 말을 다시 침묵시키는 판결에 다름 아니다.
더욱이 이번 판결은 일반적인 판례 경향과도 상충된다. 통상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를 한 경우, 법원은 이를 범행을 시인하거나 최소한 사실관계를 인정한 정황으로 본다. 그러나 재판부는 오씨가 피해자에게 보낸 명백한 사과 메시지를 오히려 ‘문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한 방어적 행동’으로 해석하며 무죄의 근거로 삼았다. 피해자는 지난 2021년 10월, 오씨에게 “강제추행을 당한 기억이 자꾸 떠올라 괴롭다, 진심으로 사과를 받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고, 오씨는 “진심으로 사과한다, 아껴주고 보듬어주고 싶은 심정이 지나친 행동으로까지 간 것 같다, 고맙고 애틋한 마음에 네가 딸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이성으로 느끼기도 했다”는 답을 했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당시 오씨가 출연한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사과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피고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통상적인 사법 판단 기준에서 보더라도 매우 이례적이고, 성폭력 사건의 권력·위계 구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다.
또한 재판부는 피해자 주거지 복도의 구조, 센서등의 작동 여부, 피해자가 사건 이후에도 피고인에게 감사·안부 메시지를 보낸 점 등을 근거로 피해자의 진술에 의심을 제기했다. 심지어 ‘피해자가 너무 늦게 상담소를 방문했다’는 비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피해자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이는 현실의 피해자 행동양식을 무시한, 반(反)성인지적 판단이다.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 이익’ 원칙의 기계적 적용을 경계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원칙은 무고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형사법의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성폭력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기계적 적용은 결국 그 원칙이 권력자의 방패로 기능하고 피해자에게는 침묵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는다. 피해자의 진술이 ‘합리적 의심 없이’ 입증되기 어려운 사건 구조 자체를 간과한 이번 판결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법정에서 다시 상처받는 현실을 반복하게 만든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첫째, 대법원은 이미 판례로 확립한 ‘성인지 감수성’ 원칙에 따라, 해당 사건에 대해 최종 유죄 판결을 내릴 것을 촉구한다. 둘째, 피해자와 가해자의 사회적·위계적 관계를 범죄 성립 판단의 중요한 요소로 명확히 반영하라. 셋째,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 평가 시 ‘피해자다움’의 고정관념이 아닌 정황적·구조적 분석을 기준으로 삼아라. 넷째, 성폭력 사건에서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 이익’ 원칙의 기계적 적용을 지양하고, 피해자 보호 중심의 증명 접근을 제도적으로 보완하라.
이번 판결은 단순히 한 개인의 유무죄를 넘어, 한국 사법체계가 성폭력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위계와 권력, 젠더와 구조를 보지 못한 정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니다.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는 이번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성폭력 사건의 구조적 특성을 반영한 성인지적 사법개혁과 판결 원칙의 제도화를 강력히 촉구한다.
2025년 11월 13일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